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아프리카 전역 (문단 편집) == 영국의 반격 == || [[파일:3dd8f91866c72e6afb7b64c4680afdea.jpg|width=100%]] {{{#000 1941년 11월 28일 [[리비아]] 토브룩 인근에서 전투 중 휴식을 취하는 영국군 제4왕립전차연대 소속 [[마틸다 II|마틸다 Mkll]] '디피언스'}}} || 웨이벌 장군은 [[이탈리아군]]이 퍼져있던 3개월 동안 충분한 정보를 수집하였고 3만 6천명에 달하는 [[영국군]]과 충분한 양의 물자를 비축하였으며 본토에서 새로 [[마틸다 II]]까지 보급받은 현재 준비상황은 충분하다고 판단하였고, 12월 콤파스 작전(Operation Compass)의 개시를 선언하였다. 당시 이탈리아군의 방어기지는 10 ~ 20km 간격을 두고 7개소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정보에 따르면 이탈리아군의 근무 및 경계태세도 개판이었고 방어진지도 허접하기 그지없는 수준이었다. 덤으로 사막전의 특성상 얼마든지 방어진지를 우회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에 대한 대비도 제로상태였다. 그래도 이탈리아군을 기만하기 위해 일상적인 기동훈련이라 병사들에게 말하고 병력을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이러한 영국군 일부의 움직임은 이탈리아 정찰기에 의해 발견되었으나 "'''뭐 그게 대단한 일이라고... 나중에 서류로 보고해'''"란 답변을 받았다. 그리고 12월 9일 배치가 끝난 영국군은 이탈리아군 방어거점 중에서 가장 취약한 곳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마틸다 II]]를 앞세운 영국군의 공세는 한참 게으르게 늘어져있던 이탈리아군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였고 그나마 보유한 이탈리아군의 [[M11/39]] 같은 중형전차라 부르기도 부끄러운 허접전차들은 쌩철갑탄 [[2파운더]] 대전차포에 밥솥마냥 터져나갔고 반대로 대전차소총 따위로 아무리 갈겨봤자 영국군의 기갑은 우습게 튕겨냈다. 생각보다 쉽게 방어기지를 점령하자 웨이벌 장군은 나머지 기지에 대한 공격도 지시하였고 이탈리아군은 이렇다할 저항없이 박살이 났다. 당초 웨이벌 장군은 시디 바라니 지역에서 5일간의 제한적인 반격작전을 구상하였는데 이탈리아군이 알아서 무너지는 바람에 불과 2일만에 시디 바라니 지역을 탈환하였다. 이에 웨이벌 장군은 시디 바라니 전투 이후 어디 갈 수 있는 곳까지 가보자고 결심하고 리비아를 향해 폭주기관차마냥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상대라는 이탈리아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맞상대하기는 커녕 그냥 무질서하게 패주하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이탈리아군 장군이 직접 부하들에게 무기를 버리라는 지시와 함께 항복하기도 했다. 전혀 생각하지도 않은 패주에 당황한 무솔리니는 그라치아니 원수에게 쌍욕을 퍼부으면서 수비를 지시하였다. 어쨌든 리비아 국경선에 가까우며 개전전부터 이탈리아가 보유한 관계로 요새화된 바르디아 [[항구]]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이탈리아군은 영국군을 충분히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병력을 투입하였으나 바보가 아니라면 [[요새]]에 닥돌하는 것은 그럴 수 밖에 없을 경우에만 눈물을 머금고 하는 행위이다. 당시의 영국군은 해당 지역의 이탈리아 공군보다는 공군력에서 우세했고, 해군력에서는 더한 우세를 보였기 때문에 해군과 공군을 동원해서 집중폭격을 시작했다. 그래서 해상에서는 영국 지중해 함대가, 공중에서는 [[빅커스 웰링턴|웰링턴 폭격기]]와 블렌헤임 폭격기들이 몰려와 바르디아를 콩가루로 만들었고, 결국 1월 4일 바르디아를 점령한 영국군은 "다음 목표는 [[토브룩]]이다!"를 선언하고 진격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2월 5일 이탈리아군의 저항을 분쇄하고 토브룩마저 점령했다. '''토브룩'''까지 함락당하자 이탈리아 패잔병들은 해안도로를 따라서 트리폴리로 도주하는 긴 여정에 올랐으며, 사막을 강행돌파한 영국군의 매복에 걸려서 그나마 있던 기갑전력을 몽땅 날려먹고 엄청난 물자를 방기한 채 사람만 간신히 호구를 빠져나갔다. 게다가 이렇게 빠져나간 사람보다 포로로 잡히거나 전사한 사람이 많다는 대패를 당했다. 결과적으로 반격작전이 진행된 10주 동안 영국군은 '''무려 800km나 진격하는 기염을 토했고''', 13만명에 달하는 이탈리아군 [[포로]]와 수많은 이탈리아군의 전차나 화포, 수많은 물자를 노획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다시 말하지만 이때 영국군 전체 병력이 약 3만명이었다! 반격작전을 지휘한 웨이벌 장군이나 오코너 장군 모두 영국군이 올린 기대 이상의 성과에 오히려 당황했을 정도였다. 30만 병력으로 구성되었던 이탈리아의 이집트 침공군은 제8군과 제10군, 2개 군이 궤멸되고 장성 22명을 포함해 무려 13만 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멀쩡한 병력은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를 수비하기 위해 남겨두었던 일부에 불과했다. 그야말로 대참패.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